용산시대

용산의 역사

용산은 과거 서강·마포·두모포·송파와 함께 한강의 수운을 통해 전국 물자가 집결한 장소였으며,
숭례문(崇禮門)과 동작진(銅雀津)을 연결하여 시흥·군포·수원으로 가는 남행길이었다.

한양 천도 후 용산에는 군량미 조달을 위한 둔전(屯田), 군수 식품의 저장·출납기관인 군자감(軍資監),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인 만리창(萬里倉), 기와·벽돌을 만들던 와서(瓦署)가 있었다.

남산(목멱산)의 산세와 연결된 용산은 삼각산(三角山)과 관악산(冠岳山)을 연결하는 녹지축 역할과 한강의 수운으로 강북이 연결되는
지형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 고지도에서의 용산 (출처:도성도, 19세기)
  • 구용산과 신용산 (출처:경조오부도, 1856년)

용산공원 시설물

01. 사우스포스트 벙커 South Post Bunker

01. 사우스포스트 벙커 South Post Bunker

현재 한미연합군사령부 군사시설로 사용중인 사우스포스트 벙커는 용산기지의 남서쪽에 위치해 일제강점기 일본군사령부 작전센터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배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는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식민지배의 양대 기둥으로 이 곳에서 군사령관으로 재직했던 하세가와, 미나미, 고이소 등은 조선총독이 되기도 했다.

사우스포스트 벙커는 광복 이후 미7사단사령부가 사용하다가 주한미군이 철수한 직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작전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02. 용산총독관저 터

02. 용산총독관저 터

주한미군 121병원(2019.11 평택 이전)이 있던 이곳은 일명 ‘용산아방궁(龍山阿房宮)’으로도 불렸던 용산총독관저가 위치했다.

용산총독관저는 제2대 조선총독에 오른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본인을 위한 일본군사령관 관저로 지은 유럽풍의 초호화 건축물이었으나,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용산총독관저로 용도 변경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미7사단 위관장교 숙사로, 1949년 7월 주한미군 철수 직후에는 미군사고문단(KMAG) 장교 클럽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폭격을 받아 파괴된 채로 방치됐다. 그 후 1950년대 후반 미군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다.

03. 용산위수감옥

03. 용산위수감옥

용산위수감옥은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둔지산 자락에 위치해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군 감옥으로 1909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감옥(형무소)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이후에는 미7사단 구금소로 사용됐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1949년 7월 대한민국 국방부가 용산기지에 자리잡으면서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감옥을 둘러싼 벽돌담장과 일부 건물들이 당시 원형 그대로 남아있으며, 용산총독관저 터(121병원 부지)와 함께 사우스포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04. 둔지산

04. 둔지산

위수감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둔지산 정상에 오르게 된다. 둔지산은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산(약 70m)으로 남산에서 이어지는 지맥의 일부다.

예부터 한강을 지키는 군부대가 둔(屯)을 치고 있는 곳이라서 ‘둔지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평지 가운데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둔지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둔지산 자락에는 우리 선조들의 마을인 둔지미(둔지리) 마을이 있었으나, 일제가 1906년부터 둔지산 일대를 군사기지화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2차례에 걸쳐 강제 이주당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

05. 미8군사령부

05. 미8군사령부

미8군사령부 청사는 일제강점기 보병병영을 재활용한 것으로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CFC)가 창설되기 전까지 유엔군사령부(UNC)·주한미군사령부(USFK)·미8군사령부(EUSA)가 함께 있었던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다.

주한미군의 상징인 미8군사령부(EUSA)는 1944년 6월 10일에 미 본토에서 창설되었다.

미8군사령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배치돼 1951년경 옛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물에 자리하다가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9월 15일 미8군사령부는 옛 서울대 건물을 반환하고 용산기지로 이전했다.

06. 한미연합군사령부

06. 한미연합군사령부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한미연합방위태세의 심장부로 한미 부대를 통합지휘하기 위해 1978년 11월 7일에 창설되었다.

이로써 1960~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력이 신장되면서 한미군사협력과 유대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한미연합군사령부 건물은 1970년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의 지원을 받아 완성된 건물로 지붕은 한국전통 기와를 사용하고 벽체는 콘크리트 형태로 구성돼 1970년대 한국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07. 조선시대 만초천 지류

07. 조선시대 만초천 지류

만초천(덩굴내)은 원래 인왕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돼 한강으로 흐르는 약 7.7km에 이르렀던 큰 하천이었으나, 1960년대 복개가 진행되어 지금은 거의 볼 수 가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용산미군기지 내에 복개되지 않은 상태로 약 300m 구간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용산미군기지 내에 남아있는 만초천은 엄밀히 말해 남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돼 삼각지 부근의 만초천 본류와 만나는 지류이다.

1960년대부터 복개공사를 시작하여 현재는 자취마저 찾아볼 수 없기에, 용산기지에 남아있는 만초천 지류는 옛 자연과 생태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연문화유산이다.

08.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옛 일본군 장교숙소)

08.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옛 일본군 장교숙소)

현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은 원래 용산기지 내 일본 육군 장교들이 머물렀던 장교숙소로 1908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줄곧 일본군 장교숙소로 사용되다가, 해방 직후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소련군 대표단의 수행원들이 머무르기도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5년 대구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와 미군사고문단(KMAG)이 용산으로 이동했다. 이 때 육군본부는 현 전쟁기념관 부지에 자리를 잡았고 미군사고문단은 흥미롭게도 앞서 언급한 옛 일본군 장교숙소(미소공위 당시 소련군대표단 수행원 숙소)를 미군사고문단 본부로 사용했다.

09. 舊 병기지창 무기고

09. 舊 병기지창 무기고

병기지창은 일본군의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던 곳으로 인근의 육군창고(현 캠프킴 부지)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주한미군 역사실에서 발간한 『Historical Walking Tour of Yongsan Garrison(2008)』에 따르면 병기지창 일대 일부 건물은 일제 말(1944~1945) 보충대 막사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1908년 완공된 병기지창 병기고(兵器庫=무기고) 건물은 현재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주한미군 사병막사로 이용되었다.

10. 남단터(추정) 풍운뇌우단

10. 남단터(추정) 풍운뇌우단

남단(풍운뇌우단)은 조선시대 한양도성 내 종묘(宗廟), 사직단(社稷壇)과 더불어 한양 도성 밖 성저십리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제례시설로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원래 ‘산천단(山川壇)’으로 불렸는데 1406년 숭례문 밖 목멱산 남쪽(둔지산)으로 옮겨졌고, 1411년 5월 ‘풍운뇌우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남단은 1906~1908년 일본군 병영 조성과정에서 훼손되었고 현재는 유구로 추정되는 일부 석물만이 남아있다.